무함마드 지아울하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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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함마드 지아울하크는 1924년 영국령 인도에서 태어나 파키스탄 육군 장성으로 복무했으며, 1977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988년 사망할 때까지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이슬람화를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등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종교적 불관용을 조장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지아울하크의 사망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것이며, 그의 유산은 파키스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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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 로마자 표기 | Muhammad Zia-ul-Ha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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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파키스탄 |
| 대통령 정보 | |
| 직위 | 대통령 |
| 대수 | 제6대 |
| 취임일 | 1978년 9월 16일 |
| 퇴임일 | 1988년 8월 17일 |
| 총리 | 무함마드 칸 주네호 |
| 개인 정보 | |
| 출생일 | 1924년 8월 12일 |
| 출생지 | 영국령 인도, 펀자브주 잘란다르 |
| 사망일 | 1988년 8월 17일 |
| 사망지 | 파키스탄 펀자브주 바하왈푸르 |
| 배우자 | 베굼 샤피크 지아 |
| 자녀 | 무함마드 이야즈 울 하크 무함마드 안와르 울 하크 루비나 살림 자인 지아 쿠라툴란 지아 |
| 출신 학교 | 델리 대학교 세인트 스티븐스 칼리지 왕립 인도 육군 사관학교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 |
| 정당 | 없음(계엄) |
| 종교 | 이슬람교 |
| 군 경력 | |
| 소속 | 영국령 인도 육군 파키스탄 육군 |
| 복무 기간 | 1943년 ~ 1947년 (영국령 인도 육군) 1947년 ~ 1988년 (파키스탄 육군) |
| 계급 | 육군 대장 |
| 지휘 | 파키스탄 육군 참모총장 제1기갑사단 사단장 |
| 참전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
| 기타 정보 | |
| 전임 대통령 | 파잘 일라히 초드리 |
| 전임 대통령 대수 | 5대 |
| 후임 대통령 | 굴람 이스하크 칸 |
| 후임 대통령 대수 | 7대 |
2. 어린 시절 및 가족
무함마드 지아울하크는 1924년 8월 12일, 영국령 인도 펀자브주 잘란다르의 펀자브인 가문에서 태어났다.[163] 그의 아버지는 영국 인도군 총사령부(GHQ)에서 근무했으며,[164]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서 자녀들에게 쿠란 학습과 기도를 강조하는 등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165]
지아울하크는 심라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고, 이후 델리의 세인트 스테판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164][1] 데라둔의 인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167][2]
1950년 8월 10일, 라호르에서 사촌인 샤피크 지아(Shafiq Zia)와 결혼하여[1]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다. 그의 아내 샤피크 지아는 1996년 1월 6일에 사망했다.[3] 그의 자녀 중에는 정치인, 특수 교육 대상 아동 등이 있으며, 일부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4][5][6][7][8][9][10][11][12] 또한 그의 사촌 중에는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파키스탄 정계에 관여한 인물도 있다.[13][14]
2. 1. 인도에서의 초기 생애
무함마드 지아울하크는 1924년 8월 12일, 영국령 인도 펀자브주 잘란다르의 펀자브인 가문에서 태어났다.[163] 그의 아버지 무함마드 아크바르 알리(Muhammad Akbar Ali)는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델리와 심라에 있는 인도 육군 총사령부(GHQ)의 행정 군단에서 근무했다.[164] 아버지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 알려졌으며, 일곱 자녀 모두 매일 아침 기도를 드리고 쿠란을 배우도록 했다.[165] 아버지의 공직 생활 때문에 지아울하크는 어린 시절을 여름에는 영국 행정부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는 아버지를 따라 심라에서, 그 외 기간에는 잘란다르에서 보냈다.[166] 그의 가족은 펀자브계 무슬림으로, 아라인족(Arain)에 속했다.
심라에서 초기 교육을 마친 후, 지아울하크는 델리에 있는 명문 성공회 선교 학교인 세인트 스테판 대학교에 진학하여 역사학을 공부했고, 194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64][1] 이후 데라둔에 있는 인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5월에 졸업했는데, 이는 인도 독립 전에 마지막으로 임관된 장교 그룹 중 하나였다.[167][2]
1947년 인도의 분할 당시 그의 가족이 난민촌에 있을 때, 대위였던 지아울하크는 우타르프라데시주 바비나의 기갑군단 훈련센터를 떠나는 난민들의 마지막 열차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여정은 7일이 걸렸으며, 분할의 여파로 발생한 집단 폭력 속에서 승객들은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166]
2. 2. 교육
심라에서 초기 교육을 마친 후, 지아울하크는 델리의 명문 세인트 스테판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1943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164] 이후 그는 데라둔에 있는 인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5월, 인도 독립 전에 마지막으로 임관한 장교 그룹 중 한 명으로 졸업했다.[167]2. 3. 결혼과 가족
1950년 8월 10일, 라호르에서 사촌인 샤피크 지아(Shafiq Zia)와 결혼했다.[1] 그의 아내 샤피크 지아는 1996년 1월 6일에 사망했다.[3]지아 부부에게는 다음과 같은 자녀가 있다.
| 이름 | 출생년도 | 비고 |
|---|---|---|
| 무함마드 이아즈울하크 (Muhammad Iyaz-ul-Haq) | 1953년 | 나와즈 샤리프 정권에서 장관 역임[4][5][6] |
| 무함마드 안와르울하크 (Muhammad Anwar-ul-Haq) | 1960년 | [4][5][6] |
| 자인 지아 (Zain Zia) | 1972년 | 특수 교육 대상 아동[7][8][9][10] |
| 루비나 살림 (Rubina Saleem) | - | 파키스탄 은행가와 결혼, 1980년부터 미국 거주[11] |
| 칼라투란 지아 (Khathulan Zia) | - | 파키스탄 의사 아드난 마지드와 결혼, 현재 런던 거주[12]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는 영국령 인도 육군 장교로 군 경력을 시작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168] 1947년 파키스탄이 건국되자 신생 파키스탄 육군에 합류하여 복무했으며, 미국에서 군사 교육을 이수하기도 했다.[169]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등 주요 분쟁에 참여하며 군 내부에서 경력을 쌓아나갔다.[170]
사촌인 미안 아브둘 와히드(Mian Abdul Wahid)는 외교관으로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키스탄 대사를 지냈으며, 파키스탄의 핵 보유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나와즈 샤리프파(PML-N)에 오랫동안 관여한 후 파키스탄 인민당(PPP)으로 당적을 옮겼다.[13][14]
3. 군 경력
3. 1. 초기 군 경력
1943년 5월 12일, 인도 므호우(Mhow)의 장교 양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령 인도 육군에 임관하여[168] 기병대를 기계화한 제13 기병 연대(13th Lancers)에 배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과 싸웠으며,[168] 1945년 5월에는 태평양 전쟁의 버마 전투와 말레이 작전에 참전했다.
1947년 인도 분할로 파키스탄이 건국되자, 인도 기병 변경 부대 연대의 소령으로 신생 파키스탄 육군에 합류했다. 그는 제13 연대와 제6 연대에서도 복무했다. 같은 해 인도 독립 직후에는 우타르프라데시주 바비나(Babina)에서 출발하는 난민 열차를 7일간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기간 동안 인도의 종교 갈등으로 인해 지속적인 총격 위험에 노출되었다.[15] 1950년 9월에는 가이드 기병대(Guides Cavalry)로 옮겼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캔자스주 포트레이븐워스의 미국 육군 사령부 및 일반 참모 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169]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후에는 퀘타에 있는 명령 및 참모 대학(Command and Staff College)에서 지휘 참모(Directing Staff, DS)로 근무했다.[169]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에는 제101 보병 여단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보급 장교였다는[17] 설과 준장이었다는[170] 설이 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요르단에 파견되어 요르단군 훈련 임무 책임자를 맡았다. 그는 요르단 내전(검은 9월 사건) 발발 3년 전부터 암만에 주재하고 있었으며, 내전이 발생하자 요르단 측을 지원했다. 당시 CIA 관계자 잭 오코넬(Jack O'Connell)의 보고에 따르면, 지아는 후세인 1세 국왕의 지시로 시리아의 군사력을 평가하고,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요르단군의 공격 작전을 계획했으며, 기갑사단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나와지슈(Nawazish) 소장은 지아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요르단군 기갑사단을 지휘하며 총사령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고하며 군법회의 회부를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굴 하산 칸(Gul Hassan Khan) 중장의 중재 덕분에 지아는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3. 2. 요르단 내전 참전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요르단에 주재하며 파키스탄 군사 훈련단의 책임자를 맡았다. 이 기간 중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 요르단 정부 간의 요르단 내전(검은 9월 사건으로 알려짐)이 발발하자, 지아울하크는 요르단 측에 가담하여 군사 작전에 관여했다. 그는 내전 발발 3년 전부터 암만에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 CIA 관계자였던 잭 오코넬(Jack O'Connell)에 따르면, 지아울하크는 후세인 1세 요르단 국왕의 지시로 시리아의 군사력을 평가하기 위해 북부 지역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후세인 1세에게 요르단 공군(RJAF) 비행대대 배치를 권고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요르단군의 공격 작전을 계획하고 작전에서 기갑사단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코넬은 또한 지아가 직접 전장에서 요르단군을 지휘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A.O. 미타(Aboobaker Osman Mitha) 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지아울하크는 이러한 군사 행동으로 인해 군법회의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나와지슈 소장은 지아울하크가 총사령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요르단군 기갑사단을 지휘했다는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을 야히야 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굴 하산 칸 중장이 지아울하크를 위해 중재에 나섰고, 야히야 칸 대통령은 결국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3. 3. 육군 참모총장 임명
무함마드 지아울하크는 1943년 5월 12일, 인도 기병대에서 영국령 인도 육군에 임관했으며[168],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47년 인도 분할로 파키스탄이 건국되자, 그는 인도 기병 변경 부대 연대의 소령 계급으로 새로 창설된 파키스탄 육군에 합류했다. 이후 13번 연대와 6번 연대에서도 복무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는 미국 캔자스주 포트레이븐워스에 위치한 미국 육군 사령부와 일반 참모 대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후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퀘타에 있는 명령 및 참모 대학에서 지휘 참모(DS) 직책을 맡았다.[169]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에는 101 보병 여단을 이끄는 준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70] 이러한 군 경력은 그가 파키스탄 군부 내에서 입지를 다지는 기반이 되었다.
4. 1977년 군사 쿠데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고 정치적 지지 기반도 약화되었다.[171] 부토 정권은 야당인 국민 아와미당(NAP)과 그 지도자 압둘 왈리 칸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는데, 발루치스탄주의 NAP 주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172], 부토의 측근이었던 하야트 셰르파오가 페샤와르에서 폭탄 테러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NAP를 불법화하고 다수의 지도부를 체포하는 등 강경 조치를 이어갔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1977년 7월,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쿠데타로 실각한 부토 총리의 부인 누스라트 부토는 쿠데타의 법적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지아의 군사 정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파키스탄 대법원은 당시 파키스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군부의 개입은 군사적 필요성에 해당한다는 이른바 “필요성의 원리”(Doctrine of necessityeng, 1954년의 판례와는 구별됨)를 적용하여 쿠데타를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지아 군사 정권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독재 체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법적 근거가 되었다. 한편, 부토 전 총리는 대법원 항소 심리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일부 판사들이 군사 정권의 행위에 아무런 제한 없이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의견에 동의하기도 했다.
4. 1. 쿠데타 이전의 불만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임기가 진행됨에 따라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으며, 그의 인기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과거 부토와 동맹 관계였던 민주 사회주의자들과의 연대도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되었다.[171] 부토 정권은 초기에 야당 지도자인 압둘 왈리 칸과 그의 정당인 국민 아와미당(NAP)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NAP 역시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나, 부토의 파키스탄 인민당과는 국회 안팎에서 이기적인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갈등이 점점 심해졌다.이러한 갈등은 연방 정부가 분리주의 활동 혐의를 들어 발루치스탄주의 NAP 주 정부를 축출하면서 본격화되었다.[172] 이후 페샤와르의 국경 마을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부토 총리의 측근이었던 하야트 셰르파오가 사망하자, 부토 정권은 이를 빌미로 NAP를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고 당 지도부의 상당수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파키스탄 내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4. 2. 쿠데타 발생 (페어플레이 작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임기 중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고, 과거 동맹이었던 민주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도 점차 약화되었다.[171] 부토 정권은 초기에 야당인 국민 아와미당(NAP)과 그 지도자 압둘 왈리 칸을 겨냥했다. 두 세력은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172] 연방 정부는 분리주의 활동 혐의를 들어 발루치스탄주의 NAP 주정부를 축출했으며[172], 페샤와르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부토 총리의 측근 하야트 셰르파오가 사망하자 NAP를 불법화하고 다수의 지도부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1977년 7월 군사 쿠데타 이후, 실각한 부토 총리의 부인 누스라트 부토는 지아울하크의 군사 정권을 상대로 쿠데타의 합법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소송을 냈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이유로 군부의 개입이 군사적 필요성에 해당한다고 판단, 이른바 “필요성의 원리”(1954년의 개념과는 다름)를 내세워 쿠데타를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결과적으로 지아 군사 정권의 독재를 강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편, 부토 전 총리는 대법원 항소 심리에 직접 출석하여, 일부 판사들이 군사 정권에 아무런 제한 없이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고 지적한 의견에 동의를 표하기도 했다.
4. 3. 선거 연기와 책임 추궁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임기 중 상당한 비판에 직면했고, 그에 대한 지지도는 점차 하락했다. 과거 부토와 연대했던 민주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도 시간이 지나면서 악화되었다.[171] 부토 정권은 초기에 야당 지도자인 압둘 왈리 칸과 그의 정당인 국민 아와미당(NAP)을 겨냥했다. 두 정당 모두 사회주의 이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안팎에서의 이해 충돌은 점점 심화되었다. 결국 연방 정부는 분리주의 활동 혐의를 들어 발루치스탄주의 NAP 주 정부를 해산시켰고[172], 페샤와르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부토의 측근인 하야트 셰르파오가 사망하자 NAP를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고 지도부 대부분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1977년 7월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부토 총리의 부인 누스라트 부토는 쿠데타의 법적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지아울하크의 군사 정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이 소송에서 '필요성의 원리'(Doctrine of necessity)를 내세워 판결했다. 이는 1954년의 판례와는 다른 것으로, 당시 파키스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부토 정권에 대한 쿠데타는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합법적인 조치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판결은 지아 군사 정권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토는 대법원 항소 변론에 직접 참여하여, 일부 판사들이 "군사 정권의 쿠데타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고 판결할 수는 없다"고 말한 것에 동조하기도 했다.
지아 군사 정권 하에서 상급 판사를 임시적으로 임명한 것은 정권이 실시한 가장 빠른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45] 지아는 부토가 소련, 중국 등 동구권 국가 및 미국을 제외한 서방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 그리고 쿠데타 이전에는 PPP가 주요 직책을 장악하고 있어 사실상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45]
계엄령 발령 후, 지아는 파잘 이라히 초드리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해 1977년 9월 23일 셰이크 안와룰 하크 판사를 파키스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게 했다.[45] 기존의 무함마드 야쿠브 알리 대법원장은 누스라트 부토가 제기한 청원의 재심을 수용하기로 결정한 직후인 1977년 9월 20일 강제로 해임되었다.[45] 야쿠브 알리 판사가 해임되자, 부토는 새로운 대법원장 임명에 반대했다. 그는 지아가 해외 순방 중일 때 안와룰 하크가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입법 조치가 이루어질 것을 우려했으며,[45] 안와룰 하크가 공개적으로 부토 정권을 비판해왔다고 주장했다.[45]
그러나 부토의 이의 제기는 안와룰 하크 신임 대법원장에 의해 기각되었다. 안와룰 하크는 대법원장으로서 부토 관련 재판을 직접 심리했으며, 파키스탄 전역에 계엄령이 유지되는 가운데 부토의 모든 사건을 처리하고 판결을 내렸다.[45] 지아가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직후, 마울비 무슈탁 후세인 판사 역시 지아와 안와룰 하크의 지지를 받아 라호르 고등법원의 임시 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마울비 판사는 부토가 정적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기 전부터 그의 사형을 주장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45] 1979년 지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을 때도 안와룰 하크 판사가 파키스탄의 국정 운영을 대행했다.[45]
4. 4. 필요성의 원리
실각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의 부인인 누스라트 부토는 1977년 7월의 군사 쿠데타가 법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지아의 군사 정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이 소송에 대해 “필요성의 원리”(1954년의 판례와는 다름)로 알려지게 될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당시 파키스탄의 위험하고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지아가 부토 정권을 전복시킨 쿠데타는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합법적인 행위였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지아 군사 정권의 독재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참고로, 부토는 대법원에서의 항소 변론에 직접 출석하여, "군사 정권에 쿠데타에 관한 어떠한 제한도 부과하지 않고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고 말한 일부 판사의 의견에 동의했다.4. 5. 줄피카르 알리 부토 재판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임기 중 상당한 비판에 직면하며 인기가 점차 줄어들었고, 과거 그와 연대했던 민주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도 멀어졌다.[171] 부토는 초기에 야당 지도자인 압둘 왈리 칸과 그의 정당인 국민 아와미당(NAP)을 겨냥했다. 두 정당은 이념적으로 유사했지만, 국회 안팎에서의 이해관계 충돌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연방 정부는 분리주의 활동 혐의를 들어 발루치스탄주의 NAP 주 정부를 해산시켰고[172], 페샤와르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부토의 측근 하야트 셰르파오가 사망하자 NAP를 불법화하고 지도부 대부분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1977년 7월 군사 쿠데타로 실각한 부토 총리의 부인 누스라트 부토는 쿠데타의 합법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지아의 군사 정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이 소송에서 "필요성의 원리"(Doctrine of necessity, 1954년의 원리와는 다름)를 내세워,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지아의 쿠데타는 군사적 필요성에 따른 합법적인 조치였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지아 군사 정권의 독재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부토는 대법원 항소 심리에서 직접 변론하며, 일부 판사들이 "군사 정권에 아무런 제한 없이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고 지적한 점에 동의하기도 했다.
5. 계엄령 하의 고위 관리 임명
부토 정권의 관계자 대부분은 해임되었으나, 파잘 일라히 초드리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도록 설득되었다. 그러나 실제 권력은 지아가 장악하고 있었고, 초드리 대통령은 명목상의 국가원수에 불과했다.[48] 초드리는 임기가 만료되자 지아의 연장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임했으며, 이후 지아는 1978년 9월 16일 파키스탄 대통령에 직접 취임했다.
6. 대통령 재임 (1978-1988)
부토 정부 해임 이후 형식적인 국가 원수였던 파잘 일라히 초드리 대통령이 1978년 9월 16일 사임하자, 지아울하크는 대통령직을 승계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173] 그는 의원내각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며 강력한 대통령제와 기술관료정치를 선호했고[49], 이를 위해 정당 활동 금지, 의회 해산 후 자문 기구인 '마즐리스-에-슈라' 설치[50], 군부-관료-기술관료 중심의 통치 체제(MBT) 구축 등 정치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52] 또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논란 속에서 1984년 국민투표와 1985년 비정당 총선을 실시했으며[49][53],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는 파키스탄 헌법 제8차 수정과 같은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53] 이 기간 동안 이슬람화 정책 역시 주요 국정 과제로 추진되었다.[50]
6. 1. 대통령 취임
부토 정부 관계자 대부분이 해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잘 일라히 초드리 대통령은 형식적인 국가 원수로서 자리를 유지하도록 설득되었다.[173][48]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지아울하크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48] 초드리 대통령은 임기가 만료되자 지아울하크의 연임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임했으며, 이에 따라 지아울하크는 1978년 9월 16일 파키스탄 대통령직에 올랐다.[173][48]6. 2. 정치 구조의 변화
지아울하크는 다당제 의원내각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며 강력한 대통령제와 기술관료정치를 선호했다.[49] 이를 위해 1979년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1981년 의회를 해산했으며, 대신 대통령 자문 기구인 '마즐리스-에-슈라'(مجلسِ شورىٰ پاکستان|마즐리스-에-슈라ur, 연방 협의회)를 설치했다. 이 기구는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들로 구성되어 실질적인 권한 없이 정부 정책, 특히 이슬람화 정책을 형식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50][49][51]또한 군부, 관료, 기술관료가 정치를 주도하는 '군부-관료-기술관료 정치'(MBT)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는 이전 부토 정권에 대한 불신에 기반한 것이었다.[52] 이 과정에서 Agha Shahi|아가 샤히영어, Sharifuddin Pirzada|샤리푸딘 페르자다영어, 나와즈 샤리프, 마부불 하크, Aftab Ghulam Nabi Kazi|압타브 카지영어, Roedad Khan|로다드 칸영어, 굴람 이샤크 칸 등 여러 기술관료들이 정권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52]
6. 2. 1. 마즐리스-에-슈라 설치
지아울하크는 표면적으로 자유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임시로 정권을 유지한다고 했지만, 이전의 군사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다당제 의원내각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혼란과 비효율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는 대통령제와 전문가 중심의 기술관료정치를 선호했다.[49] 1979년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시킨 데 이어, 1981년 말에는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마즐리스-에-슈라'(مجلسِ شورىٰ پاکستان|마즐리스-에-슈라ur, 연방 협의회)를 새롭게 설치했다. 이는 대통령에게 자문하고 Islamization in Pakistan|파키스탄의 이슬람화영어 정책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50]마즐리스-에-슈라의 구성원 350명은 모두 대통령이 직접 임명했으며, 이들은 대통령과 협의할 권한만 가졌다. 실제로는 정부가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 마즐리스-에-슈라가 승인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형식적인 역할에 그쳤다.[49][51] 구성원 대부분은 지식인, 학자, 율마, 언론인, 경제학자 및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지아 정권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군부, 관료, 기술관료가 정치를 주도하는 이른바 '군부-관료-기술관료 정치'(MBT) 사상을 따른 것이었다. 군정 초기에는 전문가, 기술자, 군 고위 인사들이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이전 부토 정권 정치인들에 대한 지아의 강한 반감이 이러한 기술관료 중심 체제를 강화하는 배경이 되었다.[52] 물리학자 출신 외교관 Agha Shahi|아가 샤히영어, 법학자 Sharifuddin Pirzada|샤리푸딘 페르자다영어, 기업가 출신 나와즈 샤리프, 경제학자 마부불 하크, 고위 관료인 Aftab Ghulam Nabi Kazi|압타브 카지영어와 Roedad Khan|로다드 칸영어, 화학자 출신 외교관 굴람 이샤크 칸 등이 지아 군사 정권 하에서 주요 기술관료로 활동했다.[52]
6. 2. 2. 1984년 국민투표
부토 처형 이후 파키스탄 국내외에서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지아는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선거 이전에 국가 원수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를 원했다.결국 지아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1984년 12월 19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의 질문은 형식상 지아를 향후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지아에 대한 반대가 곧 이슬람교에 대한 반대인 것처럼 보이도록 교묘하게 설계되었다.[49] 이는 유권자들이 자유롭게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투표 결과 97.8%라는 압도적인 찬성률로 지아가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실제 투표율은 전체 유권자의 20%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져, 국민투표의 정당성과 대표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6. 2. 3. 1985년 의회 선거와 헌법 개정
1984년 국민투표 이후, 지아울하크는 국제 사회의 압력에 따라 1985년 2월, 정당 참여 없이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선거관리위원회에 지시했다.[53] 주요 반대 정당 대부분은 정당으로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선거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 당선된 많은 의원들은 실제로는 특정 정당에 소속되어 있었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정당 참여 금지, 즉 선거의 "무소속화"가 만들어낸 정치적 공백을 민족주의적, 종파주의적 세력이 파고들어 국가 통합을 저해했다고 지적한다.[54]지아울하크는 총리를 해임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주지사와 군 장관을 임명하는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했다. 총리로는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으로 알려진 신드 출신의 무함마드 칸 주네조가 임명되었다.[55]
새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고 계엄령을 해제하기 전에, 지아울하크는 새로 구성된 의회로 하여금 1977년 쿠데타를 포함하여 지난 8년간 자신이 행한 모든 조치를 소급하여 승인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여러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특히 대통령에게 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예비적 권한"을 부여한 파키스탄 헌법 제8차 수정이 대표적이다. 이 수정안은 표면적으로는 이전까지 대통령이 임의로 행사할 수 있었던 의회 해산권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였고, 대통령의 권한 측면에서 오히려 후퇴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신임 결의로 내각이 해산된 후 아무도 정부를 구성할 수 없거나, 정부가 헌법에 따라 기능하지 못한다고 명백히 판단될 경우에만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아울하크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조치였다.[53]
7. 경제 정책
일반적으로 지아울하크는 경제 발전과 정책에 대해서는 이슬람화를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두었으며, 경제 관리는 굴람 이스하크 칸, Aftab Ghulam Nabi Kazi|아프타브 굴람 나비 카지eng, 와심 자프리와 같은 기술 관료들에게 주로 위임했다.[174][56]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1977년부터 1986년까지 파키스탄 경제는 연평균 6.8%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174][56]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 정책보다는 주로 해외 노동자들이 보내온 송금 덕분이었다.[174] 지아울하크 정부 초기에는 송금액이 급증하여 1980년대 대부분 연간 총 32억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당시 파키스탄 국내총생산(GDP)의 10%, 경상수지의 45%, 총 외환 수입의 40%를 차지하는 규모였다.[175][176][57][58]
지아울하크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부토 정권의 국유화 프로그램은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지아울하크 정권 하에서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국유화 프로그램이 점진적으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국유화된 산업에서 권위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업화'라는 아이디어가 지아울하크 대통령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그의 초기 구상 중 잘 알려진 것은 무이자 경제 순환을 특징으로 하는 국가 경제의 이슬람화 시도였다. 하지만 실제 산업 민영화 조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세 개의 제철소만이 이전 소유주에게 반환되었을 뿐이다.[177][59]
이러한 기조는 정권 후반기에 변화의 조짐을 보였는데, 1987년 말에 이르러 파키스탄 재무부는 점진적인 민영화와 경제 자유화를 포함하는 정책 방향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8. 외교 정책
지아울하크 정권의 외교 정책은 이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정권의 노선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지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특히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미국, 특히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지아 정권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중요한 파트너로 간주하며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60][61] 이는 파키스탄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확보하는 배경이 되었다.[63] 반면, 소련과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인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슬람 세계 내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시 중재를 시도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공식적인 중립 표방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67][68]
한편, 지아 정권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 시절 시작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군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고 강력하게 추진했다.[69] 국제 사회의 압력과 감시 속에서도 전략적 모호성 정책을 유지하며 비밀리에 핵 능력 개발을 지속했으며,[70][74] 핵 기술을 다른 국가로 확산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69]
8. 1. 미국과의 관계

미국, 특히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지아 정권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지아가 이끈 보수적인 군부 통치 체제의 중요한 동맹으로 여겨졌다.[60] 레이건 행정부는 지아 정권을 공산주의 위협에 맞서는 미국의 "최전선" 동맹국으로 선언했다.[60][61] 미국과 파키스탄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헨리 키신저, 찰리 윌슨, 조앤 헤링, 민간 정보 장교 마이클 필즈베리와 구스트 아브라코토스, 그리고 미군 고위 관리인 존 워시 주니어 미국 합참의장과 허버트 M. 워섬 장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지아 정권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며 파키스탄을 자주 방문했고, 파키스탄 정계에 "기득권층"(establishment)이라는 개념을 확산시키는 데 조언하기도 했다.[60] 명목상 로널드 레이건이 속한 미국 공화당의 미국 보수주의에 영향을 받은 지아는 이슬람 보수주의를 군사 정권의 주요 노선으로 채택하여 국내에서 이슬람교 및 기타 종교적 관습을 강제로 시행했다.[60]
이러한 미국의 지지 배경에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부토의 사회주의 정책과 소련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냉전 시대 미국의 경계심을 샀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소련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는 것과 소련이 파키스탄의 온난한 항구 접근권을 확보할 가능성을 우려했다.[60][62] 이 때문에 파키스탄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부토 정권을 무너뜨린 쿠데타 배후에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미국 정부의 개입이 있었다고 널리 의심한다.[60][62] 미국의 전 법무장관 램지 클라크는 부토의 재판에 참석한 후, 미국 정부가 부토 정권 붕괴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며 비판하기도 했다.[62]
반면 미국 정부는 부토 실각에 대한 개입을 전면 부인하며, 부토 스스로가 집권 5년 동안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고 국민적 반감을 샀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슬라마바드의 주파키스탄 미국대사관 소속 한 미국 외교관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토가 파키스탄을 이끌었던 5년 동안, 부토는 1970년대 총선에서 그에게 압도적인 표를 던진 가난한 대중을 감정적으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부토에게는 많은 적들이 있었다. 취임 후 2년 동안의 사회주의 경제와 주요 민간 산업의 국유화는 재계를 크게 동요시켰다. 1976년 7월, 정미, 도정, 제당, 면화 채취 등의 산업을 국유화한다는 경솔한 결정은 중소기업 경영자와 상인들을 분노케 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지식인, 학생, 노동조합원 등 좌파는 모두 부토가 중도우파의 보수적인 경제 정책으로 전환하고, 파키스탄의 전통적인 권력자인 강력한 봉건 영주들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한 것에 배신감을 느꼈다. 1976년 이후 부토의 공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와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의원들, 반체제 인사들, 반대파들에 대한 흔히 가혹한 대응도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8. 2.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년 12월 25일,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 침공 이후, 지아는 군사 회의 의장직을 맡았지만, 소련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몇몇 장관들로부터 전쟁 개입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지아는 이념적으로 이웃 국가들이 공산주의에 지배당하는 시나리오에 반대했고, 소련이 온난한 바다를 찾아 파키스탄, 특히 발루치스탄으로 진출해 올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 아프가니스탄의 저항 운동(무자헤딘)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할 의도를 공개적으로 밝혔다.[63]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파키스탄에 4억달러의 지원을 제안했다. 지아는 결국 카터의 후임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32억달러의 지원 증액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회의에서 당시 군사정보국(ISI) 국장이었던 악타르 아브둘 라흐만 중장은 이슬람 과격파를 무장시키는 아프가니스탄 비밀 작전을 제안했다. 이 회의 이후, 지아는 라흐만 중장의 지휘 아래 이 작전을 승인했고, 나중에 미국과 중앙정보국(CIA)이 자금을 지원한 사이클론 작전의 일부가 되었다.[64]
1982년 11월, 지아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소련의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장관과 유리 안드로포프 신임 서기장이 지아를 만났다. 안드로포프는 파키스탄이 소련과 그 위성국인 사회주의 국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을 지원하는 것에 분노를 표했다. 지아는 안드로포프의 손을 잡고 "서기장님, 저를 믿어주십시오. 파키스탄은 소련과 매우 좋은 관계만을 원합니다."라고 말했다.[65] 그로미코에 따르면, 지아의 성의는 그들을 설득했지만, 그 말대로 행동했는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65]
지아는 부토의 외교 정책 구상을 정반대로 바꾸어 우선 미국, 일본과 같은 서방 국가와의 더 강력한 유대를 구축했다. 지아는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단절했고, 국가 자본주의가 그의 주요 경제 정책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가 찰리 윌슨은 지아와 CIA가 협력하여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로부터 탈취한 소련의 무기를 아프가니스탄 전투원들에게 흘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윌슨은 지아가 관계자들에게 "상자에 다윗의 별을 붙이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주장한다.[66]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기간 동안 불법 약물 거래가 급증하고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전 세계로 확산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아프가니스탄의 마약 산업은 1979년 소련 침공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무자헤딘과 같은 반공 저항 세력의 여러 요소들이 무기 구입 자금 부족에 시달리며 마약 거래에 손을 댄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배후에서 자금을 지원한 CIA와 미국 정부가 묵인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81]
8. 3. 이란-이라크 전쟁
1980년 9월 22일,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이란-이라크 전쟁의 이란 침공)하면서 약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아울하크는 전쟁을 끝내고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9월 27일에는 테헤란을, 29일에는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파키스탄은 이란에 무기를 판매했으며, 이는 탱커 전쟁에서 이란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67][68].8. 4. 핵무기 개발
1977년 정권을 장악한 지아울하크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 시절인 1972년에 시작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군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는 조치를 단행했다.[69] 이전까지 민간 과학자가 주도하던 위원회는 해산되었고, 육군 공병 장교 출신인 자히드 알리 악바르 칸이 핵개발 계획 전체의 책임을 맡아 군사적 목표와 연계하여 계획을 강화했다.[69]지아울하크가 집권했을 당시 핵개발 계획은 이미 연구 시설 가동 및 관련 작업의 90%가 완료되는 등 상당 부분 진척된 상태였다.[69] 군부의 강력한 지원 아래 개발은 속도를 내어, 1983년 3월 11일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PAEC)는 키라나 구릉 지역에서 코드명 "키라나 I"으로 명명된 핵분열 장치의 첫 저온 핵분열 실험(cold test)에 성공했다.[70] 이후 1980년대 내내 추가적인 저온 핵실험이 이어졌다.[70] 지아울하크는 핵개발 과정에서 서방 스파이의 침투를 극도로 경계하며 강한 비밀주의를 유지했다.[70]
국제 사회는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우려를 표하며 핵확산금지조약(NPT) 서명을 압박했지만, 지아울하크는 이를 인도의 핵개발 계획과 연계시키며 자위적 조치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69][71] 또한, 그는 핵 보유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 정책을 채택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핵개발 성공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국제 사회의 제재를 피하고 전략적 이점을 얻으려는 의도였다.[74] 이 정책 하에서 지아울하크는 미국 등 국제 사회에 핵개발 현황에 대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거나 상반된 약속을 하며 기만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미국 측에 무기급 플루토늄이나 5%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확약했지만, 실제로는 개발을 계속 진행했다. 1981년 중앙정보국(CIA) 부국장 버넌 A. 월터스가 관련 증거를 제시하며 추궁하자, 지아울하크는 모순된 해명을 하기도 했다.[74] 월터스는 훗날 지아울하크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뛰어나고 애국적인 거짓말쟁이"였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74]
8. 4. 1. 핵확산
1977년 정권을 장악한 지아울하크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1972년에 시작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군의 통제하에 두는 조치를 단행했다.[69] 이전까지 이 계획은 민간인인 무바시르 하산 박사가 이끄는 과학총국 산하 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었으나, 지아는 하산을 체포하고 민간 위원회를 해산시킨 뒤 군인인 자히드 알리 악바르 칸 소장에게 계획의 전권을 맡겼다.[69] 악바르 소장은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여 파키스탄 육군 총사령부(GHQ)에서 핵 개발 계획을 총괄하며, 연구에 제한과 목표를 설정하여 군 주도로 계획을 강화했다. 그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과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이끄는 과학 연구를 5년간 지휘하며 핵무기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69]지아가 집권했을 당시 핵 개발 계획은 이미 연구 시설이 완비되고 작업의 90%가 완료된 상태였다.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PAEC)와 칸 연구소(KRL)는 부토 정권 하에서 구축된 연구 인프라를 바탕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69] 악바르 중장은 지아에게 핵무기 기술과 제조의 중요성을 보고했으며, 그의 추천으로 지아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을 핵 개발 계획의 과학 책임자로 공식 임명했다. 이는 민간 과학자들이 국제적 압력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악바르의 보고를 지아가 신뢰했기 때문이다.[69]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83년 3월 11일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PAEC)는 키라나 구릉 지역에서 "키라나 I"이라는 암호명 아래 핵분열 장치의 첫 저온 핵실험에 성공했다. 악바르 중장은 즉시 GHQ로 가서 지아에게 성공 소식을 보고했으며, PAEC는 1980년대 내내 여러 차례 추가적인 저온 핵실험을 실시했다.[70]
관계자들은 지아가 서구 스파이들이 핵 개발 계획에 침투해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핵무기 계획의 역할을 확대하고 극도의 편집증을 보였다고 기술한다. 그는 사실상 PAEC와 KRL을 분리시키고 과학자들에게 특정 개발 측면을 맡기기보다는 중요한 관리 결정을 직접 내렸다. 이러한 행동은 핵무기 개발 계획의 혁신을 자극하는 동시에 강렬한 비밀주의와 보안 문화를 PAEC와 KRL에 스며들게 했다.[70]
쿠데타 이후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고, 지아는 핵 개발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핵확산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동구권 국가들, 특히 북한, 이란, 그리고 개혁개방 이전의 중화인민공화국 등에 핵 기술을 확산시키려 했다.[69] 1981년에는 중국과 계약을 맺어 파키스탄의 무기급 우라늄을 제공하고 중국 내 원심분리기 연구소 건설을 지원했다. 이러한 정책은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리비아의 핵개발 계획을 지원하려는 시도를 부추기기도 했으나, 당시 긴장 상태였던 리비아와의 관계로 인해 칸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69] 지아는 이러한 핵확산 정책을 통해 파키스탄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다른 국가들로 분산시켜 비난을 피하고자 했다.[77]
지아 사후, 후임 육군 참모총장인 밀자 아슬람 베그는 압둘 카디르 칸의 핵확산 활동을 더욱 부추겼고, 칸은 북한, 이란, 리비아 등 핵 개발 야심을 가진 국가들과 협력할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2004년, 당시 대통령이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퍼베즈 무샤라프는 파키스탄 군부와 정치 체제의 체면을 이유로 칸을 핵 개발 프로그램에서 해임했다.[78]
지아울하크의 핵확산 정책은 국제 사회, 특히 북한과 이란 등 동구권 국가들의 핵 개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북한은 자체 핵 개발 프로그램으로 국제 사회의 제재 대상이 되자, 지아의 전례처럼 시리아와 이란의 핵 개발을 지원하려 했다.[69] 북한과 시리아의 핵 개발 연계는 2007년 이스라엘이 오차드 작전을 통해 시리아의 핵 시설을 파괴하고 북한 과학자 10명을 사살하면서 드러나기도 했다.
8. 4. 2. 핵무기 개발 확대
1977년 지아가 집권한 직후 추진한 주요 정책 중 하나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1972년에 시작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군부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었다.[69] 이전까지 이 계획은 과학총국(Science Division)의 관리 아래 무바시르 하산 박사가 이끄는 민간 위원회가 주도했으나, 지아는 하산을 체포하고 민간 위원회를 해산시켰다.[69] 핵개발 계획은 무니르 아흐마드 칸과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각각 작업을 지휘하며 부토와 하산에게 보고하는 방식이었으나, 지아는 공병 장교 출신인 자히드 알리 악바르 칸 소장(이후 중장으로 진급)에게 핵개발 계획 전체의 관리를 맡겼다.[69] 악바르 소장은 핵개발 계획을 군의 관리하에 두고 목표와 제한을 설정하며 계획을 강화했으며, 무니르 아흐마드 칸과 압둘 카디르 칸 아래에서 5년간 핵무기 개발을 지휘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69]지아가 정권을 잡았을 때, 핵개발 관련 연구 시설은 이미 대부분 가동 중이었고, 관련 작업의 약 90%가 완료된 상태였다.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PAEC)와 칸 연구소(KRL) 역시 부토 정권 시절부터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다.[69] 악바르 소장은 파키스탄 육군 총사령부(GHQ)로 자리를 옮겨 지아에게 핵무기 기술과 제조의 중요성을 보고했으며, 핵개발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의 추천에 따라 지아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을 핵개발 계획의 과학 부문 책임자로 임명했다.[69]
핵개발은 꾸준히 진척되어, 1983년 3월 11일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PAEC)는 이쉬파크 아흐마드 박사의 지휘 아래 키라나 구릉 지역에서 코드명 "키라나-I"으로 명명된 핵분열 장치의 첫 저온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 자히드 악바르 중장은 이 성공을 지아에게 직접 보고했다.[70] 이후 PAEC는 1980년대 동안 여러 차례 추가적인 저온 핵분열 실험을 실시했다. 관련 자료인 『''Eating Grass''』에 따르면 당시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70]
"지아는 서구 스파이들이 이 프로젝트에 침투해 있다고 굳게 믿었고, 핵무기 계획의 역할을 확대하며 극도의 편집증을 공사 모두에 반영했다. 그는 사실상 PAEC와 KRL을 분리시키고, 과학자들에게 핵무기 개발 계획의 측면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관리상의 결정을 내렸다. 그의 행동은 핵무기 개발 계획의 혁신에 박차를 가했고, 강렬한 비밀주의와 보안이 PAEC와 KRL에 스며들었다."
지아는 핵개발 계획에서 부토의 개인적인 영향력을 배제했지만, 부토가 시작한 핵무기 정책 자체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자히드 알리 악바르 칸이 물러난 후, 지아는 부토의 측근이자 PAEC 위원장이었던 무니르 아흐마드 칸에게 핵개발 계획의 주도권을 넘기고 그를 자신의 과학 고문으로 임명했다.[69] 또한 무함마드 칸 주네조 총리의 지지를 받아 1985년 쿠샤브 지역에 50MW급 중수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인 쿠샤브-I 건설을 승인하며 핵물질 생산 능력을 확충했다.[69]
나아가 지아는 핵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우주 및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에도 착수했다.[69] 그는 원자력 기술 전문가인 살림 메후드를 파키스탄 우주 고층대기 연구 위원회(SUPARCO) 위원장으로 임명했으며,[79] 파키스탄 최초의 군사 위성인 바드르-1의 개발을 지시했다.[79] 1987년에는 안와르 샤밈 당시 공군 참모총장과 탈라트 마수드 중장의 주도 하에 비밀리에 항공우주 프로젝트와 미사일 연구 개발 계획을 시작했다.[80]
8. 4. 3. 핵무기 개발 관련 외교 관계
1977년 집권 직후, 지아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1972년에 시작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군의 통제 하에 두는 조치를 취했다.[69] 이전까지 민간 과학총국과 무바시르 하산 박사가 이끌던 민간 위원회가 관리하던 것을, 지아는 하산을 체포하고 위원회를 해산시킨 뒤 공병 장교 출신인 자히드 알리 악바르 칸 소장에게 핵개발 계획의 전권을 맡겼다. 악바르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공병대장으로서 계획 전체를 군사적으로 관리하며 연구에 제한과 목표를 설정하고 효율성을 높였다.[69] 지아가 집권했을 당시 핵개발 계획은 이미 상당 부분 진척되어 연구 시설이 가동 중이었고, 파키스탄 원자력 위원회(PAEC)와 칸 연구소(KRL)의 연구 인프라도 구축된 상태였다. 악바르는 파키스탄 육군 총사령부(GHQ)에서 지아에게 핵무기 기술과 제조의 중요성에 대해 보고하며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의 추천으로 지아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을 핵개발 계획의 과학 책임자로 최종 승인했다.[69]이러한 노력은 1983년 3월 11일, PAEC가 키라나 구릉 지역에서 이쉬파크 아흐마드 박사의 지휘 아래 코드명 "키라나 I"로 명명된 핵분열 장치의 저온 핵분열 실험에 성공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악바르 중장은 실험 성공을 즉시 GHQ의 지아에게 보고했다.[70] 관련 자료인 『''Eating Grass''』에 따르면, 당시 관계자들은 지아가 서방 스파이의 침투를 강하게 의심하며 핵개발 계획에 극도의 비밀주의를 적용했다고 기술한다. 지아는 PAEC와 KRL을 사실상 분리하고 과학자들에게 특정 분야만 담당하게 하는 등 중요한 관리적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핵개발 계획의 혁신을 촉진하는 동시에 강렬한 비밀주의와 보안 강화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70]
1970년대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정권이 미국 등 서방 세계로부터 강한 외교적 압박과 비판에 직면했던 것과 달리, 지아는 보다 다양한 외교적 접근 방식을 사용했다.[69]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파키스탄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하지 않아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지아는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인도의 핵개발 계획과 연계시켜 국제 사회의 압력을 교묘하게 무력화했다.[69] 그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 및 아가 샤히 외무장관과 협력하여, 핵무기 사용 포기 선언 등을 포함한 5개 항의 제안을 통해 NPT 서명 압박에 대한 현실적인 반론을 제시했다.[71] 또한, 지아는 핵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동시에 산업화와 규제 완화를 통해 파키스탄 경제를 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시켜, 핵개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제적 압력을 완화하려 시도했다.[72][73]
> ...지아는 자국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지아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뛰어나고 애국적인 거짓말쟁이"였던 것일까...
> — 버넌 A. 월터스, 1981[74]
1981년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의 핵개발 계획을 파괴하기 위해 실시한 오페라 작전의 성공 이후, 파키스탄에서는 인도 공군이 자국의 핵시설에 대해 유사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었다.[75] 지아는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안와르 샤밈 장군에게 인도의 공격 계획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 샤밈은 공군력만으로는 공격을 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할 것을 지아에게 제안했다.[75] 이에 따라 무니르 아흐마드 칸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인도의 저명한 핵물리학자 라자 라만나를 만나, 파키스탄 핵시설에 대한 공격은 양국 간의 핵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했다.[76] 동시에 샤밈 참모총장은 파키스탄 공군의 방어 능력 강화를 위해 미국의 F-16 파이팅 팰컨 전투기와 중국의 Q-5 팡탄 공격기 도입을 추진했으며, 핵시설 보호를 위한 '센티넬 작전'(Operation Sentinel)을 개시했다. 이러한 군사적, 외교적 노력은 인도의 인디라 간디 총리가 파키스탄과 핵 문제에 대해 대화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를 낳았고, 결국 양국은 서로의 핵시설을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정부 대표단 협정을 맺었다. 1985년 F-16과 Q-5가 도입된 후, 샤밈은 핵무기의 보호 및 운용을 전담하는 공군 전략 사령부를 발족시켰다.[75]
지아는 1977년부터 핵 보유 여부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 정책을 채택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핵개발 성공 사례를 참고한 것이었다. 이 정책 하에 지아는 핵개발 계획의 실제 상황에 대해 국제 사회, 특히 미국을 상대로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거나 상반된 약속을 하는 등 기만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미국 측에 무기급 플루토늄이나 5% 이상의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확약했다. 그러나 1981년 10월, 중앙정보국(CIA) 부국장 버넌 A. 월터스가 파키스탄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지아가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며 추궁하자, 지아는 처음에는 정보가 "진실일 것"이라고 인정했다가 이후 모든 것을 부인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74] 이러한 지아의 태도에 대해 월터스는 훗날 회고록에서 지아가 자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대해 정말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뛰어나고 애국적인 거짓말쟁이"였는지 의문을 제기했다.[74]
9. 파키스탄의 이슬람화
지아 정권의 주요 정책이자 핵심은 파키스탄 사회 전반의 “이슬람화”였다.[82] 이는 부토 총리 시절 시작된 일부 조치를[83][84] 더욱 강화하고, 샤리아에 기반한 이슬람 국가 체제(니잠-에-무스타파)[84] 수립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지아는 이슬람 시스템 도입이 파키스탄 존립의 필수 전제 조건이라 강조하며,[85] 울레마와 이슬람 정당의 영향력을 강화했다.[87][82][84] 이슬람화 정책은 법률 개정(후두드 규정, 모독 금지 조례 등), 자카트 징수 의무화, 마드라사 지원 확대 등 사회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으나,[91] 그 동기와 효과에 대한 논란 및 시아파, 수니파 내 종파 갈등을 유발하기도 했다.[89][90][92][93] 이슬람화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영향은 아래 하위 섹션들에서 상세히 다룬다.
9. 1. 이슬람화 정책 추진 배경
지아 정권의 주요 정책이자 핵심은 “이슬람화”였다.[82]쿠데타 이전인 1977년, 부토 총리 시절 이미 무슬림의 와인 음주 및 판매, 나이트클럽, 경마 등이 금지된 바 있었다.[83][84] 지아는 이러한 조치를 더욱 강화하며, '''니잠-에-무스타파'''("예언자의 지배" 또는 이슬람 체제, 즉 이슬람 국가와 샤리아의 확립[84]) 시행을 약속했다.
국가 원수로서의 첫 TV 연설에서 지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이슬람의 이름으로 탄생한 파키스탄은 이슬람에 충실하는 한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슬람적인 시스템의 도입이 이 나라에 있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85]
그는 과거 통치자들이 “많은 통치자들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비판했다.[86]
지아는 이슬람화를 통해 부토 정권의 "의식주"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및 세속주의 지향을 바꾸려 했다. 그는 이러한 지향이 파키스탄의 자연 질서를 어지럽히고 도덕심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88] 지아는 1979년 영국 언론인 이언 스티븐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 파키스탄의 근본적인 부분은 이슬람교였다…인도아대륙의 이슬람교도와는 별개의 문화이다. 이 부분이 파키스탄으로서 인도아대륙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이원론적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부토 씨가 이 사회에서 번영하는 방법으로 찾아낸 것은 도덕적 정신을 좀먹는 것이었다. 학생과 교사, 아이와 부모, 집주인과 세입자, 노동자와 공장주를 대립시킴으로써 그것을 만들어냈다.(파키스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일하지 않아도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사회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한 것)…우리는 이슬람교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것은 나도 정부도 아니다. 부토에 대한 거리에서의 반항·저항·반부토 운동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지아는 각 고등법원(후에 연방 샤리아 법원)에 “샤리아 법정”[87]을 설치하여 코란과 순나의 가르침에 따라 법률 사건을 재판하고, 파키스탄의 법률과 규정을 이슬람 교리에 맞게 조정했다. 또한, 울레마와 이슬람 정당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특히 자마트-이-이슬라미당의 활동가 1만 명을 정부 요직에 임명하여 자신의 정책이 사후에도 지속되도록 했다.[82][84] 보수적인 울레마들이 이슬람 이데올로기 평의회에 참여하게 된 것도 지아의 이슬람화 정책 때문이었다.[87]
그러나 지아의 이슬람화 동기가 순수한 신앙심인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례로 그는 안정이 필요했던 발루치스탄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지크리파와 울레마 사이의 분쟁에 대해 침묵했다는 지적이 있다.[89] 세속주의 및 좌파 세력은 지아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슬람을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파키스탄의 전 퍼스트레이디였던 누스라트 부토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 1971년 전쟁(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참화는 파키스탄 국민의 마음과 정신 속에 (지금도) 살아 있으며,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지아는 매우 무분별하게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정권의 존속을 확실하게 한 것이었다.
지아가 국가 주도의 이슬람화를 통해 국가 결속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는지 여부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90] 1980년에 시행된 자카트 우슈르 조례는 라마단 첫날 개인 은행 계좌에서 연 2.5%를 공제하여 빈곤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는 제도였으나, 자카트 징수를 의무로 여기지 않는 시아파 무슬림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1981년 4월, 정부는 자파르 법학파를 따르는 시아파의 면제 신청을 받아들였다.[91]
수니파 내부에서도 갈등이 불거졌다. 지아는 데오반드파의 교리를 지지했는데, 이로 인해 신드주의 수피 스승들(바렐비파)은 반지아 민주화 운동(민주주의 회복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92] 캐나다계 파키스탄인 수피 이맘인 사이드 소하르와르디는 “지아는 파키스탄을 수피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살라피즘이 지배하는 국가로 바꿨다”고 주장하며, 지아의 영향으로 모스크와 군대 내에서 데오반드파의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고 추정했다.[93]
9. 2. 후두드 규정
파키스탄 사회를 이슬람화하기 위한 지아 정권의 첫 번째이자 가장 논란이 된 조치 중 하나는 1979년의 '후두드 규정'(Hudud Ordinances영어) 도입이었다. 이 규정은 기존 파키스탄 형법(PPC)의 일부를 대체했다.[94] '후두드'는 샤리아(이슬람법)에서 허용되는 행동의 한계와 같은 제한이나 규제를 의미한다. 이 규정은 파키스탄 법에 간통죄와 간음죄(지나, Zina)라는 새로운 범죄를 추가하고, 태형, 절단, 돌팔매질이라는 새로운 형벌을 도입했다.[95]절도 또는 강도의 경우, 기존 파키스탄 형법의 처벌인 금고형, 벌금형 또는 두 가지 모두가 절도의 경우 범죄자의 오른손 절단, 강도의 경우 오른손과 왼발 절단으로 대체되었다. 지나(혼외 성교)의 경우, 기존 간통 관련 규정은 후두드 규정에 따라 미혼 위반자는 태형 100대, 기혼 위반자는 돌팔매질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형벌은 모두 하드 형에 필요한 증거 기준(이슬람 남성 증인 4명 등)이 충족되는지에 따라 부과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엄격한 증명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워, 2024년 현재까지 파키스탄 사법 제도에 의해 돌팔매질이나 신체 절단형이 집행된 사례는 없다. 대신, 절도, 지나, 음주 등의 범죄는 보다 증명 기준이 덜 엄격한 '타지르' 기준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경우 태형이나 금고형이 선고되었고 실제로 많은 태형이 집행되었다.
인권 단체, 여성 운동가, 변호사, 정치인들에게 가장 큰 우려를 낳은 부분은 수천 명의 강간 피해자가 오히려 '지나' 죄로 기소되어 투옥되었다는 점이다.[83] 후두드 규정 하에서는 강간 사건의 입증 책임이 여성 피해자에게 있었고, 여성의 증언만으로는 법적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96] 만약 피해자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면, 소송을 제기한 행위 자체가 합법적인 결혼 관계 외의 성관계를 자백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강간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지나'를 저지른 범죄자로 취급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은 피해자들이 강간 사실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후두드 규정은 2006년 이 통과되어 개정되기 전까지 효력을 유지했다.[97]
샤리아에 기반한 형벌이 도입되었지만, 적법 절차, 증인 및 증거법, 기소 시스템 등은 여전히 영국 식민지 시대의 법체계를 따르고 있었다.[98] 이처럼 파키스탄의 기존 형법(국가가 제정한 현대적 법)과 후두드 규정(종교적이고 공동체에 기반한 법)의 혼합은 두 법 체계 간의 근본적인 논리 차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야기했다.[83]
9. 3. 이슬람 법
지아 정권의 핵심이자 주요 정책은 '이슬람화'였다.[82] 이미 쿠데타 이전인 1977년, 부토 총리는 무슬림의 와인 음주 및 판매, 나이트클럽, 경마를 금지했는데,[83][84] 지아는 이러한 조치를 더욱 강화했다. 그는 '''니잠=에=무스타파'''(Nizam-e-Mustafa, "예언자의 지배" 또는 이슬람 체제, 즉 이슬람 국가와 샤리아의 확립[84])를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국가 원수로서 첫 TV 연설에서 지아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탄생한 파키스탄은 이슬람에 충실하는 한 계속 존속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슬람적인 시스템의 도입이 이 나라에 있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85]
그는 과거 통치자들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비판했다.[86]
지아는 각 고등법원에 "샤리아 법정"(이후 연방 샤리아 법원으로 발전)[87]을 설치하여, 코란과 순나의 가르침에 따라 법률 사건을 재판하고 파키스탄의 법률 및 규정을 이슬람 교리에 맞게 수정하도록 했다. 또한 울레마(이슬람 학자)와 이슬람 정당의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자마트-에-이슬라미 당원 1만여 명이 정부 요직에 임명되어 지아 사후에도 그의 정책 기조가 이어지도록 했다.[82][84] 이슬람 이데올로기 평의회에 보수적인 울레마들이 참여하게 된 것 역시 지아의 이슬람화 정책의 일환이었다.[87]
이슬람화는 "의식주"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던 부토 정권의 사회주의적, 세속주의적 지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지아는 이러한 경향이 파키스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국민의 도덕심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88] 1979년 영국 언론인 이언 스티븐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다.
"파키스탄의 근본적인 부분은 이슬람교였다…인도 아대륙의 이슬람교도와는 별개의 문화이다. 이 부분이 파키스탄으로서 인도 아대륙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이원론적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부토 씨가 이 사회에서 번영하는 방법으로 찾아낸 것은 도덕적 정신을 좀먹는 것이었다. 학생과 교사, 아이와 부모, 집주인과 세입자, 노동자와 공장주를 대립시킴으로써 그것을 만들어냈다.(파키스탄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파키스탄 사람들이 일하지 않아도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사회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한 것)…우리는 이슬람교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이슬람교를 강요하는 것은 나도 정부도 아니다. 부토에 대한 거리에서의 반항·저항·반부토 운동은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다."
지아의 이슬람화 정책 동기가 순수한 신앙심인지 정치적 계산인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일각에서는 지아가 발루치스탄에서 발생한 지크리파(Zikris, 이단으로 간주됨)와 울레마 간의 분쟁에 대해 침묵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선택적 태도를 비판한다.[89] 세속주의 및 좌파 세력은 지아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슬람교를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파키스탄의 전 영부인 누스라트 부토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1971년 전쟁(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참화는 파키스탄 국민의 마음과 정신 속에 (지금도) 살아 있으며,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지아는 매우 무분별하게 이슬람교를 이용하여 정권의 존속을 확실하게 한 것이었다."
지아의 이슬람화 정책이 국가 결속 강화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도 논란거리이다.[90] 1980년에는 자카트 우슈르 조례(Zakat and Ushr Ordinance)가 시행되었다. 이 조례는 라마단 첫날 개인 은행 계좌에서 연간 2.5%를 의무적으로 공제하여 빈곤 구제 기금으로 사용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자카트 위원회가 설립되어 기금 배분을 감독했다. 그러나 자카트 징수를 의무로 여기지 않는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1981년 4월 정부는 시아파에 대한 면제 조치를 발표했다.[91]
수니파 내부에서도 갈등이 불거졌다. 지아는 데오반드파의 교리를 지지했는데, 이로 인해 신드주의 수피(바렐비파) 지도자들은 반지아 민주화 운동(민주주의 회복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92] 캐나다계 파키스탄인 수피 이맘 사이드 소하르와르디는 “지아는 파키스탄을 수피가 지배하는 국가에서 살라피즘이 지배하는 국가로 바꿨다”고 말하며, 지아의 영향으로 모스크에서 수피의 비율이 70%에서 55%로 줄었고, 특히 군대 모스크에서는 70년대 90%였던 수피 비율이 현재 85%가 데오반드파로 바뀌었다고 추정했다.[93]
지아의 통치 하에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크게 제약받았다.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은 머리를 가리도록 강요받았으며, 이는 공립학교, 대학교, 국영 방송 등에서 시행되었다. 스포츠와 무대 예술 분야에서 여성의 참여는 엄격히 제한되었다. 비판가들에 따르면, 이슬람 율법 해석에 따라 여성의 법적 증언 효력이 남성의 절반으로만 인정되었다.[96]
1981년, 이자 지급은 손익 분배 방식(Profit and Loss Sharing, PLS)으로 대체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름만 바꾼 이자라는 비판도 있었다. 교과서는 비이슬람적인 내용을 제거하기 위해 검토되었고, 도서관에서는 비이슬람적인 책들이 악서로 간주되어 제외되었다. 그 외에도 이슬람 율법에 따라 라마단 기간 중 공공장소에서의 음식 섭취가 금지되었고, 하루 5번의 살라트(예배)가 강제되었다.
9. 4. 모독 금지 조례
지아 정권의 이슬람화 정책의 일환으로, 알라나 무함마드와 같은 이슬람의 중요 인물에 대한 모독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를 위해 1980년, 1982년, 1986년에 걸쳐 파키스탄 형법(PPC)과 형사소송법(CrPC)이 개정되었다.- 1980년 개정: 이슬람의 주요 인물에 대해 경멸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위반 시 최대 3년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99]
- 1982년 개정: 소수 종파인 아흐마디야 신도들이 스스로를 무슬림이라고 칭하거나 암시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이는 아흐마디야 공동체에 대한 법적 탄압의 근거가 되었다.
- 1986년 개정: 모독죄의 적용 범위를 더욱 확대하여,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 그의 가족(아흘 알바이트), 동료(사하바), 그리고 이슬람의 상징(샤아르-이-이슬람)에 대해 무례를 암시하는 모든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다. 위반 시 금고형 또는 벌금형, 혹은 두 가지 모두를 부과할 수 있도록 처벌을 강화했다.[100]
이러한 모독 금지 조례는 지아 정권의 이슬람화 정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나, 동시에 종교적 소수파 탄압과 표현의 자유 제한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9. 5. 마드라사 확대
파키스탄의 전통적인 종교 학교인 마드라사는 지아울하크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마드라사의 수는 893개교에서 2,801개교로 크게 증가했다. 이들 마드라사의 교리는 대부분 데오반드 학파였으며, 약 4분의 1은 바렐비 운동을 따랐다[101][102].마드라사는 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으며, 이를 통해 가난한 파키스탄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종교 교육과 숙식을 제공했다[103]. 그러나 이러한 마드라사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시청 및 청취를 금지하는 등 폐쇄적인 운영 방식을 보였으며, 일부 작가들은 마드라사가 이슬람 종파 간 또는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증오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101][102][103].
10. 문화 정책
1979년 국민 연설에서 지아는 파키스탄 내 서구 문화와 음악을 비판했다. 그 직후, 국영 방송국 PTV는 뮤직비디오 방영을 중단하고 애국적인 노래만 방송하기 시작했다.[104] 영화 산업에는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고, 라호르의 영화관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105] 또한 입장료에도 새로운 세율이 도입되어 영화관 관객 수는 더욱 감소했다.[105]
문화 비평가인 Nadeem F. Paracha|나딤 F. 파라차영어는 지아 정권 시대의 경제적 번영 속에서 오히려 도시 지역의 중산층과 하층 중산층 사이에서 정부에 대한 반발심 등의 이유로 서구적이고 반항적인 성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1980년대에는 서구적인 패션과 헤어스타일이 확산되고 록 밴드가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106]
11. 장애인 복지 정책
지아울하크는 재임 중 장애인 복지 관련 법령 제정을 감독했다. 이 법령은 「1981년 장애인(고용 및 재활) 조례」(Disabled Persons (Employment and Rehabilitation) Ordinance, 1981eng)로 불리며, 1981년 12월 29일에 제정되었다. 이 조례는 장애인의 고용, 재활, 복지에 관한 조치를 규정하고 있다.[107]
12. 주네조 총리 해임과 새로운 선거 요구
시간이 지나면서 입법부는 더 많은 자율성을 추구했고, 1988년 초 무함마드 칸 주네조 총리와 지아울하크 대통령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첫째, 주네조 총리와 마부불 하크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소련군 철수 문제와 관련하여, 철군 후 아프가니스탄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 없이 1988년 제네바 협정 서명을 강행하려 했다. 이는 지아 대통령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둘째, 주네조 총리는 과거 지아와 대립했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를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셋째, 주네조 총리는 지아가 추진하던 이슬람화 정책에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주네조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카라치에서는 심각한 폭동이 발생했고, 이 지역은 기존의 자마트-이-이슬라미당 대신 세속주의 정당인 무타히다 카우미 운동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오즈리 캠프 참사는 지아 정권의 기반을 흔드는 사건이었다. 라왈핀디 인근 오즈리 캠프의 군수품 창고에서 발생한 대규모 폭발 사고는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소련군 철수 후 미국이 무자헤딘 지원용으로 파키스탄에 보낸 무기를 파키스탄군이 인도를 겨냥해 비축하려다 발생한 절도 및 은폐 시도 과정에서 지아가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주네조 총리가 이 참사에 대한 조사를 공언하자, 사고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던 파키스탄 정보부(ISI)와 군 고위 인사들의 책임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한 지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88년 5월 29일, 지아 대통령은 개정 헌법 제58조 2항 b를 발동하여 주네조 총리를 해임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표면적인 해임 사유는 주네조 총리가 지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8년 제네바 협정 서명을 결정한 것과 오즈리 캠프 참사 책임자 처벌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시아첸 분쟁과 인도 내 칼리스탄 운동 지원 의혹 등으로 인도와의 관계도 악화된 상태였다.[53]
주네조 총리 해임 후 지아는 90일 이내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무렵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86년 귀국한 베나지르 부토가 총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부토의 인기가 높아지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국제 사회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지아는 점차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3. 사망
1988년 8월 17일, 지아울하크는 바하왈푸르에서 미군 M1 에이브럼스 전차 시연을 참관한 후 C-130B 허큘리스 항공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이 항공기는 바하왈푸르 공항을 출발해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178][108] 순조롭게 이륙했지만 직후 관제탑과의 연락이 끊겼다. 목격자들은 비행기가 비정상적으로 날다가 급강하하여 추락했고 충돌 시 폭발했다고 증언했다. 이 사고로 지아울하크를 포함하여 아흐타르 압두르 라만 합참의장, 지아울하크의 측근인 시디크 살릭 준장, 아놀드 루이스 라펠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 허버트 M. 와섬 파키스탄 주재 미군지원단장 등 총 31명이 사망했다.[179][180][109][110] 굴람 이샤크 칸 당시 상원의장이 라디오와 TV를 통해 지아울하크의 사망 소식을 공식 발표했다.
지아울하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었다.[181][111] 미국, 인도, 소련(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을 파키스탄이 지원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 또는 이들 국가와 지아울하크에 반대하는 파키스탄 군 내부 세력의 연관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82][183][112][113]
사고 조사를 위해 구성된 조사 위원회는 "항공기 내에서 자행된 파괴 행위가 가장 가능성 높은 추락 원인"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승객과 승무원을 무력화시킨 유독 가스가 기내에 방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는데, 이는 조종사가 메이데이 조난 신호를 보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184][114] 조사 과정에서 비행기록장치(블랙박스)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도 의혹을 더했다. 이전 C-130 비행에는 블랙박스가 탑재되어 있었다.[185][115]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는 마흐무드 알리 두라니 소장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지아울하크 대통령에게 전차 시연 참관을 강력히 권유했던 인물로, 파키스탄 내부 인사들과 당시 인도 주재 미국 대사였던 존 군터 딘 등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186] 두라니 소장은 이후 이스라엘과 인도가 배후라는 주장은 추측일 뿐이라고 일축했다.[187]
지아울하크의 장례식은 1988년 8월 19일 이슬라마바드 근교에서 거행되었다. 21발의 조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약 100만 명의 조문객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우호의 상징으로 지아울하크 자신이 건설을 주도한 파이살 모스크 앞, 1.2m × 3m 크기의 묘지에 안장되었다.[116] 장례식에는 후임 대통령이 된 굴람 이샤크 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등 파키스탄의 군 및 정부 고위 관리들이 참석했다. 조지 슐츠 당시 미국 국무장관도 장례식에 참석해 조의를 표했다.[117]
14. 유산
무함마드 지아울하크의 통치는 파키스탄 현대사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추진된 정책, 특히 이슬람화 정책은 파키스탄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지아주의라는 용어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이슬람법에 기반한 국가 운영, 군국주의, 권위주의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파키스탄 내에서 정치적 이슬람의 영향력을 크게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아울하크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 제도를 후퇴시키고 사회 전반에 걸쳐 종교적 불관용을 심화시켰으며, 그의 정책이 장기적으로 파키스탄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된다. 그의 통치는 이후 파키스탄 정치 지형에도 큰 영향을 미쳐 보수 세력의 부상과 군부의 정치 개입 지속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14. 1. 지아주의
지아주의(Ziaism)는 1978년부터 1988년까지 파키스탄에서 무함마드 지아울하크에 의해 실행된 정치 이데올로기이다.[118] 이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슬람 국가의 이념을 지지한다.[119] 주로 이슬람법, 산업화, 군국주의, 권위주의를 중심으로 한다.[120] 지아울하크와 그의 이데올로기는 파키스탄 내에서 정치적 이슬람을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만들었고, 비교적 세속적이었던 파키스탄을 이슬람법에 기반한 국가로 바꾸었다고 평가받는다.[121]이 이데올로기는 특히 종교적 사상과 세속적 사상이 충돌하는 파키스탄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파키스탄의 우파는 지아울하크의 교리를 지지했고, 온건파 무슬림이나 좌파 진영에서는 지아주의를 이슬람 파시즘과 비교하며 비판했다.[122]
14. 2. 평가
사후에도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는 파키스탄 내 지식인과 정계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논의되는 인물이었으며, 우익과 좌익 양쪽으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123] 파키스탄 독립 이후 짧은 역사에서 지아울하크가 남긴 유산은 가장 해롭고, 지속적이며, 바로잡거나 감추기조차 어려운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고 『Dawn』은 지적했다.[123]반면, 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소련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공로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관련 서적 저자인 인도의 저널리스트 카롤 바타체르지(Karol Batachelrjee)는 지아울하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남아시아에는 지아울하크와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남아시아 역사의 복잡한 흐름 속에 나타난 독특하고 다면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이슬람에 관해서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의 배짱은 칭찬할 만하다. 지아울하크는 핵무장 인도를 상대로 핵실험에 성공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인디라 간디가 만들어낸 힘의 균형을 바꾸었고,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모든 국제 규칙을 어겼다.[124]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은 그의 정책 결정 능력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연구했으며, 일부 저자들은 그를 "링마스터"[125], "환상의 마술사"[126], "탁월한 전략가"라고 칭하기도 했다.[127] 그러나 지아울하크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간접적으로 참여한 것과 그의 군사 전략이다.[128] 그의 통치 기간은 베나지르 부토에 대항하여 보수파가 국정에서 부상하는 데 기여했으며[128], 군부가 국정을 장악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파키스탄에서 가장 성공한 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29]

하지만 지아울하크 정권 하에서는 헤어스타일, 의복, 음악 등 서구 문화가 금지되었고[106], 이는 1980년대 파키스탄 록의 탄생과 파키스탄 민족주의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106] 오늘날까지도 지아울하크는 파키스탄 역사상 평가와 정책 모두에서 극단적인 인물로 여겨진다. 경제적 번영과 소련의 남아시아 침공을 막았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민주주의 제도를 약화시키고, 종교적 불관용을 조장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관리 부유 환율제 정책으로 루피 가치를 하락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30][131][132] 또한 보수 정치인인 나와즈 샤리프 총리의 정치적 경력을 크게 신장시킨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133][134][135]
지아울하크는 예상되었던 소련의 파키스탄 침공을 저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전 정보국장 Turki Al-Faisal|투르키 알 파이살eng 왕자는 1980년대 지아울하크와 함께 소련에 맞섰던 경험을 바탕으로 "특히 소련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고 헌신적이었다"고 평가했다.[136] 국제 문제와 지정학 전문가인 미국의 학자 Bruce Riedel|브루스 리델eng은 "여러 면에서 아프간 침공은 지아울하크의 전쟁이었다"고 평가하며, "지아울하크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역사뿐만 아니라, 거의 반세기 동안 세계 정치를 지배했던 냉전 최종 단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137][138]
2010년, Eighteenth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of Pakistan|파키스탄 헌법 수정 제18조eng가 성립됨에 따라 지아울하크가 제정한 대통령의 행정권 강화 조항들은 파키스탄 헌법에서 영구적으로 삭제되었다.[139][140]
15.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지아는 영어권 대중문화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 영국계 인도 작가 살만 루슈디의 소설 ''수치'' (''Shame'', 1983년)에서 라자 하이더 장군이라는 등장인물은 지아울하크의 삶과 매우 유사하게 묘사된다.
- 만화 ''Shattered Visage'' (1988-1989년)에서는 지아의 죽음이 프리즈너 넘버 식스 (1967년)에 등장하는 '마을' (''The Village (The Prisoner)'')과 같은 가상의 첩보 기관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설정되었다.
- 2007년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에서 인도 배우 옴 푸리가 지아를 연기했다.
- 모하메드 하니프 (Mohammed Hanif)의 2008년 풍자 소설 ''폭발하는 망고 사건'' (''A Case of Exploding Mangoes'')에서 지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141]
- 지아울하크의 압정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처형은 무르타자 부토의 딸 파티마 부토 (Fatima Bhutto)의 논픽션 회고록 ''피와 칼의 노래'' (''Songs of Blood and Sword'', 2010년)에서 언급된다.
- 2023년 넷플릭스의 액션 스릴러 영화 ''미션 마주누'' (''Mission Majnu'')에서 인도 배우 아슈와스 바트 (Ashwath Bhatt)가 지아를 연기했다.
16. 서훈
| 훈장 이미지 | 훈장명 | 비고 |
|---|---|---|
![]() | 시타라-에-하르브 훈장 |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공적 |
![]() | 시타라-에-하르브 훈장 |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공적 |
![]() | 탐가-에-장 훈장 |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공적 |
![]() | 탐가-에-장 훈장 |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공적 |
| -- | 파키스탄 훈장 | 1947년 수여 |
![]() | 탐가-에-사드-사알라-자샨-에-윌라다트-에-쿠웨이드-에-아잠 | 1976년, 무함마드 알리 진나 탄생 100주년 기념 수여 |
![]() | 히주리 탐가 | 1979년 수여 |
![]() | 탐가-에-잠후리아 | 1956년 수여 |
| 국가 | 훈장 이미지 | 훈장명 | 비고 |
|---|---|---|---|
| 요르단 | ![]() | 알-후세인 빈 알리 훈장 | [143] |
| 요르단 | ![]() | 요르단 독립훈장 | 1971년 수여 |
| 요르단 | ![]() | 요르단 별 훈장 | 1971년 수여 |
| 태국 | ![]() | 라차미트라본 훈장 | [142] |
| 영국 | 버마 스타 |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 |
| 영국 | ![]() | 1939-1945 전쟁 훈장 |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
| 영국 | -- | 1918년 일반 근무 훈장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기념 (1945년 수여) |
| 유고슬라비아 | -- | 유고슬라비아 별 훈장 (그레이트 스타) | [1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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